Install Theme

Telostory

\

시간이 간다. 시간은 조건이 없어서 정말 고맙다. 내가 50점 짜리든 10점 짜리든 심지어 0점 짜리라 하더라도 시간은 따지지 않고 흘러줘서 모든 걸 과거로 만들고 그 어떤 어설펐던 현재도 ‘그땐 그랬지’하며 넘길 수 있게 해준다. 

어릴 땐 시간을 잡지 못해 안달이었다. 남들보다 하루를 1-2시간이라도 더 길게 쓰려고 먹고 자는 시간도 아꼈다. 무엇이든 하면 하는 만큼 결과가 나오니 더더 할수록 좋았다. 인생의 절정이 있다면 지금이라 생각했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주길 바란다. 클라이맥스는 지나갔거나 오지 않았다고 믿는다. 현재가 어서 과거가 되어주길, 시간이 그렇게 나에게 또 자비를 베풀어주길 기다리고 있다. 비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기에 걸린 사람이 약을 먹고 잠을 청하며 고통이 지나가길 기다리듯- 그것보다 좀 더 긴 감기에 걸려 그것보다 좀 더 긴 잠을 청하는 것 뿐이다.

남자로 살아가며 ‘내가 지금 잘살고 있나?’를 고민할 때 가장 신뢰할 만한 지표는 여자의 얼굴인 것 같다. 인생의 평가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의 얼굴에 쓰인다.

어릴 땐 블록 네 개만 연결해도 그게 비행기라며 하늘로 들어 올렸다. 이젠 웬만큼 잘 만들지 않는 이상 비행기로 상상하기 힘든 나이가 되었다. 혹 내가 여전히 그걸 비행기라 할 수 있는 순수함을 가졌대도 주변 사람들이 혀를 찰 거다. 눈은 높아졌지만 실력은 나아진 게 없다. 방 바닥에 쏟아버린 블록 상자같이 엉망인 커리어패스는 안 해본 게 없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써 있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은 이제 모자라고도 봐주지 않는 세상에서 내가 너무한 고집을 부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도 왠지 모르게 부끄럽지만 신경이 예민한 편이다. 아마 무의식의 지배가 의식세계까지 많이 넘어오는 현상인 것 같다. 이유 없이 누군가 생각나면 꼭 하루 이틀 안에 그 사람과 마주치거나 불쑥 연락이 온다. 사용하던 물건이 뭔가 다른 인상으로 반복적으로 눈에 들어오면 곧 부서지거나 잃어버린다. 반복되는 시계 숫자따위의 공시성 인지도 흔하고 예지몽도 자주 꾼다. 

잘 정제해서 남을 위해 사용하면 센스있는 사람이란 말을 듣는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타인의 감정이나 필요를 잘 알아차릴 수 있다. 괴로운 면도 있다. 표면화된 정보 뿐 아니라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정보까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참고하며 사는 것 같다. 그래서 모르는 곳에서 스트레스 과부하가 일어나 이유 없이 지칠 때가 많다. 때론 의식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도 있어 실수도 발생한다.

주변 사람들에겐 어쨌든 미안한 일만 많은지도 모르겠다. 대체 이 사람이 무슨 이유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기 힘들 거다. 그건 내 자신도 알 수가 없어 설명을 못한다. 그래서 감정적이라는 이야기도 듣고 부끄럽게 생각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혹 어른들을 만나기 전엔 무의식적으로 앞으로 무얼 하고 살 계획인지 말을 준비하게 된다. 사실 아무 계획이 없음에도 하나 대충 만들어 둬야 그분으로부터 일장의 가르침을 회피할 수 있다. 생각해보니 지나가는 후배들 만나서 몇 학기니, 계획 있니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이렇게 꼰대가 되는 일을 피해야 하건만… 다음부턴 후배들 보면 요즘 재밌는 일 없었냐고 물어봐야겠다.

예전에 나 다이어트 좀 해야겠다고 누군가에게 말했더니 그분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살이 빠지면 좀 더 맘 편히 먹지 않을까? 라고 지극히 원초적인 답을 해서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데면데면한 사이에 내가 너무 솔직했나 보다.

먹기 위해 빼고, 뺐으니 먹고 이것 말고 다른 삶은 없을지- 쓰기 위해 벌고 벌었으니 쓰고 이것 말고 다른 삶은 없을까 하는 물음이 여전하다. 오늘은 먹고, 오늘은 쓰고 난 뒤 언젠가 한 번에 몰아서 빼야지, 언젠가 꿈꾸는 일을 하겠지 하는 식으로 나를 위로하는 게 갈수록 효과가 떨어진다. 그건 진짜 나아진 삶이 아니라 그저 한 판 푸닥거리를 기대하는 삶일 뿐이란 걸 알았다.

정말 변한 삶이란 뭘까. 내 욕망 자체가 바뀌는 것일까 아니면 내 욕망을 절제의 울타리에 넣고 당근과 채찍으로 구슬리는 삶일까. 태어나서 뭐 하나 변해본 게 있어야 그걸 알 텐데 난 아직 이 결론을 알 길이 없이 시간이 흐른다.